2016년 개봉한 영화 <Sing Street>는 음악이 중심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음악 영화라기보다는, 자라나는 소년의 눈으로 본 1980년대 더블린의 회색빛 현실, 그 안에서 피어나는 꿈과 사랑, 그리고 도망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을 담고 있습니다.
존 카니 감독은 <원스>와 <비긴 어게인>을 통해 이미 ‘음악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고, 이 영화는 그 정점을 찍습니다.
학교는 답답했고, 가정은 무너져 있었고, 세상은 무심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노래를 만들고, 밴드를 결성하고, 뮤직비디오를 찍습니다.
그게 현실을 바꾸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게 현실을 견디게는 해주었습니다. <Sing Street>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스토리 구성 – 음악을 한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영화는 코너라는 한 소년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그의 집은 위태로웠습니다. 부모는 싸우고, 형은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고, 돈은 없고, TV도 팔려갑니다.
그래서 그는 전학을 갑니다. 새로운 학교. 거기엔 규칙이 있었고, 폭력도 있었고, 이유 없는 지적이 반복됐습니다. 코너는 말없이 그 자리를 견딥니다. 아니, 어쩌면 참습니다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다 만납니다. 라피나를. 학교 앞에서 혼자 서 있던 그녀는 세상과는 다른 기운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코너는 말합니다. “우리 밴드 뮤직비디오에 출연할래요?” 밴드는 없었지만,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날부터 시작됩니다. 밴드를 모으고, 악기를 구하고, 곡을 씁니다. 말도 안 되는 합주였고, 아이들은 음악을 잘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노래를 만듭니다.
노래는 코너의 현실을 담고 있었고, 또 그 현실을 살짝 벗어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비꼬기도 했고, 어른들을 흉내 내기도 했고, 그 안에 사랑도 담겼습니다.
스토리는 전형적이지 않습니다. 뻔하지도 않고, 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야기는 그냥, 코너가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을 따라갑니다. 그게 바로 이 영화가 아름다웠던 이유였습니다.
무언가 이뤄내기보다는, 계속 뭔가를 해내려는 시도. 그게 이 영화가 보여준 성장의 모습이었습니다.
캐릭터 분석 – 다 부족한 아이들이었지만, 그래서 더 진심이었습니다
코너는 이 영화의 중심입니다. 말수가 많지도 않았고, 눈에 띄지도 않았고, 뭔가 잘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라피나를 본 순간, 어떤 확신 같은 게 생겼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용기라기보단 그냥 ‘해봐야겠다’는 감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거기서부터 그는 계속 뭔가를 시도합니다.
곡을 쓰고, 옷을 바꾸고, 머리를 염색하고, 음악을 흉내 냅니다. 누군가가 보기엔 우스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움직였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의 형 브렌든은 또 다른 축이었습니다. 처음엔 무기력하게 보였습니다. 매일 방 안에 처박혀 있었고,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죠.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코너에게 말합니다. 자신은 움직이지 못했고, 코너는 달라야 한다고요.
그 대사는 그냥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 전체의 핵심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형은 자신이 실패한 삶을 코너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라피나는 또 다릅니다. 그녀는 겉으로는 당당하고, 성숙하고, 이미 어른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보다 불안정한 인물이었습니다. 과거에 학대받은 상처가 있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코너에게 기대게 됩니다. 하지만 그 기대는 무겁지도 않고, 억압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서로의 결핍을 바라봐주는 정도. 그게 둘의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밴드 멤버들. 어쩌면 이름도 정확히 기억 안 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도 저마다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음악을 좋아했고, 코너를 믿었고, 누가 뭐래도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엔 완벽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 진짜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감정이 쉽게 밀려들었습니다.
상징과 메시지 – 도망이 아니라 도약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Sing Street>는 음악 영화입니다. 그런데 음악은 단지 배경음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 전체를 밀고 나가는 동력이자, 등장인물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언어였습니다.
특히 이 영화는 ‘모방’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Duran Duran, The Cure, Hall & Oates, The Jam… 아이들은 그들을 따라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조금씩 만들어갑니다.
중간중간 음악이 바뀌는 건 시대적 변화라기보단, 인물의 정서 변화였습니다. 처음엔 시끄럽고 과장된 사운드, 나중엔 조금씩 섬세하고 내면적인 곡들로. 그건 곧 코너가 자신을 발견해가는 흐름이었습니다.
또 하나, 이 영화가 계속해서 말하는 건 ‘탈출’입니다. 누구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게 현실이든, 감정이든, 환경이든.
하지만 영화는 그 탈출이 곧 ‘도약’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코너는 도망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더 나아지려고 했고, 그 방법이 자신이 만든 음악이었습니다.
브렌든이 말합니다. “넌 뭔가를 만들고 있어. 난 망설이기만 했어.” 그 말 한 줄이 영화를 꿰뚫습니다.
결국, 이 영화는 거창한 성공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해서 스타가 되는 이야기,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음악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살아내는 사람들 이야기였습니다.
결론 – 결국엔 노래가 남았습니다
<Sing Street>는 조용히 시작합니다. 학교에 잘 적응 못하는 소년, 답답한 가정,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한 소녀. 누구나 봤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코너는 움직였고, 노래를 만들었고, 사람들과 연결됐습니다. 사랑을 해보고, 상처도 받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그 과정 하나하나가 음악처럼 흘렀습니다.
노래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래는 그들을 계속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게 세상을 바꾸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마지막 장면. 배 위에서 코너와 라피나는 런던으로 향합니다. 배는 작았고, 바다는 거셌고, 미래는 불확실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손을 잡고 있었기에, 그게 전부였습니다.
다시 영화를 본다면, 아마 노래보다도 얼굴들이 먼저 보일 겁니다. 밴드 멤버들, 방 안의 형, 혼자 담배 피우던 소녀. 모두 다 어딘가 조금은 부서진 사람들. 하지만 그 부서진 틈으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Sing Street>는 그런 영화였습니다.